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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안내

주변 여행지, 놀거리, 주변 식당 및 특산물, 먹거리 등 소개

니산은 해발468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 참성단..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는 천제를 지내며 사적 136호로 지정된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라고 전한다. 제단은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여 하부는 둥글며 그위에 네모단 단을 쌓아 올렸다. 둥근단의 지름은 8.7m이며 네모난 단은 6.6m이며 네모난 단은 6.6m의 정방형이다. 참성단중수비는 참성단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100m 정도에 위치한 참성단 보다는 조금 낮은 봉우리의 동남쪽 아래를 지나는 등산로에 옆에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하였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에 수축하였고 숙종 26(1700)에도 보수하였다. 칠선녀에 의해 전국 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되는 곳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며 전국 체육대회의 성화가 이곳 참성단에서 칠선녀에 의해 채화되어 경기장으로 봉송된다. 한반도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마니산의 참성단은 한라산의 백록담과 백두산의 천지까지의 거리가 똑같다고 한다.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등불등자(傳火登)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으며 정화궁주의 시주물로 전해 내려오는 청동수조와 옥등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처음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강화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동막입니다. 동막해변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강화남단에 펼쳐진 갯벌은 무려1천8백만평이며 물이 빠지면 직선 4km까지 갯벌로 변합니다. 검은 개흙을 뒤집어 쓰고 기어가는 칠게,가무락,쌀무늬고둥,갯지렁이가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밀물 시에는 해수욕을 썰물 시에는 갯벌에 사는 여러 가지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족단위의 여름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인근 분오리돈대에 오르면 강화의 남단갯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인천국제공항도 보입니다. 또한 주변에 함허동천 시범야영장 및 정수사 등의 볼거리가 있습니다.

고려 고종 때 강화도로 천도하며 쌓은 성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때 강화도로 천도하며 쌓은 성이다. 몽고의 침략에 항전한 호국의 현장인 셈이다. 1259년 고려가 개성을 환도하기 전 성을 헐었는데 조선초에 다시 보수됐다가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파괴됐다. 1677년 조선 숙종 때 다시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다시 파괴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근세에는 병인, 신미양요와 일본의 침략을 겪은 아픔의 현장이다. 성안에는 남쪽에 안파루, 서쪽에 첨화루, 동쪽에 망한루, 그리고 북쪽에 진송루 등 4대문이 있었다. 온갖 시련을 겪고 세월이 흐르며 성곽과 문루가 없어졌지만 지난 1974년에 남문을, 1977년엔 북문을 복원했고 서문은 다시 개축했다. 북문에서는 멀리 휴전선 . 넘어 장단과 개성의 송악산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고향을 북쪽에 두고 있는 이들은 이곳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한 뼈아픈 역사의 현장 강화성 서문 옆에는 연무당 옛터가 있다. 이곳은 강화부의 군사들이 훈련하던 집이다.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한 뼈아픈 곳이기도 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인천, 부산, 원산의 항구가 개항되고 새로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지만, 결국 일본에게 36년 간 나라를 빼았기는 결과를 맞았다. 신문물이 들어온 현장임과 동시에 민족시련이 시작된 반성의 터다.강화성에는 동서 양쪽에 두 개의 수문이 있는데 이 안에는 김상용 순절비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이었던 김상용 선생이 강화에 와 있다가 청군의 침입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강화성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김상용 선생의 후손인 김창국이 남문터에 세운 비가 바로 김상용 순절비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글씨가 마멸되자 후손인 강화유수 김매순이 원비와 같이 새 비를 세우고 옛 비를 비각 밑에 묻었다.

강화를 대표하는 방문해볼 만한 곳 강화도에는 전적지와 궁궐 등 여러 유적을 가지고 있는데 다 둘러보자면 꽤 많은 시간이 든다. 이곳에 미리 들러 유적을 관람할 것인지 미리 정보를 가지고 떠나는 것도 시간을 아끼며 알차게 여행할 수 있는 지혜를 발취하는 방법이다. 특히 시간이 없는 여행가들에게 강화역사관은 강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꼭 방문해 볼만한다. 역사관이 문을 연 것은 지난 1988년 9월 14일 이다. 1984년 계획을 세운 이래 5년여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유물재배치 사업을 실시하여 제1실 개국시원,제2실 강화의 문화, 제3실 강화의 전쟁사, 제4실 강화의 전쟁사 등 모두 4개방으로 꾸며져 있는데 철모와 삼지창, 협도 등 전쟁과관련된 유물도 상당수 있어 우리조상의 국난극복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사적 제137호로 지정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6번지의 고인돌은 북방식이다. 현재는 지금 남아 있는 2개의 지석이 덮개돌을 받들고 있는 형태로 마치 통로와 같은 모양이다.즉 입구 역할을 하는 양끝의 마감돌이 없어진 것을 뜻한다. 지석의 크기는 서쪽의 길이가 4.50m, 두께는 0.60m이며, 높이는 1.40m이고, 동쪽 지석은 길이가 4.64m, 두께 0.80m, 높이 1.40m이다. 덮개돌(蓋石)은 장축의 길이 6.50m, 너비 5.20m, 두께는 1.20m이며 전체 고인돌의 높이는 2.60m이다. 고인돌을 이루고 있는 덮개돌의 석질은 강화도에 흔한 화강 편마암이다. 이 고인돌의 주변에 이러한 규모의 석재가 없는 것으로 볼 때 돌산이나 해안 등지에서 바위를 운반한 것으로 추측되고있다. 그 예로 마니산에는 자연 판상석을 떼어 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그러나 그러한 대형 판석의 채취와 운반 기술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으로 남고 있다.

마니산 동쪽에 자리잡은 정수사는 전등사,보문사와 더불어 강화의 중요한 사찰중의 하나이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선사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후 이곳을 보고 불자가 가히 삼매 정수할 곳이라 하여 사찰을 세우고 정수사(精修寺)라 했는데 그 후 함허대사가 절을 중수한 후 법당 서쪽의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정수(淨水)로 바꾸었다. 특히 건물 후면 공포 는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을 잘 (拱包) 나타내고 있어 건축 당시의 세부 건축 형식을 제대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 안평대군이 쓴 금자경 세 권과 함허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정수사에서는 대웅전의 창살연꽃무늬도 볼 만하다. 보물 제161호 대웅전의 창살연꽃들이 살아 있는 듯 조각이 아름답고 특이해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 이 꽃문살은 꽃병으로부터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이 살아 있는 듯해 경이롭다. 이 사찰까지는 약 30분 정도 함허동천을 따라 걷는데 경관이 아름답고 동쪽 바다로 흘러내리는 계곡도 시원하다.계곡 입구에는 시범야영장이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는 야영장,취사장, 놀이시설, 주차장까지 갖춰져 있다.

강화도의 서편 바다위에 길게 붙어 있는 작은 섬으로 산과 바다와 갯마을과 섬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 풍광 좋은 곳이다. 서울 도심에서 차로 1시간 반이면 강화 본섬의 서쪽끝 외포리 포구에 닿는다. 여기서 맞은 편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까지 1.5km 바닷길을 페리호을 타고 건너가 야 한다. 페리호는 여러 척이 수시 왕복운항한다.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건널 때 뱃전으로 날아드는 갈매기떼의 장관은 빼 놓을 수 없다. 석모도는 아직도 자연의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화 땅에는 온통 사적지와 전적지 명소들이 즐비하지만 석모도는 빼어난 도서경관과 해상풍광, 아름다운 산들이 어우러져 한 번에 자연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재지 :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60여 척의 어선들이 연안어업을 하고, 그 아낙들이 어판장에서 직접 해산물을 판매하는 김포 유일의 지방어항 대명항. 봄이면 삼식이와 주꾸미, 밴댕이, 여름이면 간혹 걸려드는 농어와 3~4kg씩 나가는 자연산 광어, 가을이면 통발을 가득 메운 살찐 꽃게가 입맛나는 곳이다. 대명항은 어부들이 그물질을 통해 잡은 해산물을 사람들 앞에 정직하게 내려놓고, 아낙들은 잡은 만큼의 해산물을 팔고 나면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는 자연산 전문 어항이다.

소재: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내가면, 강화읍, 송해면 일원
고려산(436m)의 옛 명칭은 오련산입니다.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적, 백, 청, 황, 흑색의 다섯색깔의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고려산은 그 인근에 130여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으며 고려산 북편 시루미산은 연개소문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우주항공에 대한 신지식의 장이 되고자 전시와교육을 통해 산지식을 획득해 나갈 수 있도록 재미있는 설명,각종 우주관련 전시 및 우주 항공에 대한 원리를 익힐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창의력을 키워나가는 기회를 제공한다. 옥토끼우주센터는 과학적 사고력을 향상시키고 정서를 풍부하게하는 공간으로써, 야외 공원에 계절별로 다양산 꽃들이 만발 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고 평안한 느낌을 제공하며 나아가 우리의 희망과 꿈인 어린이들이 소중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될 각종 자연 학습장을 제공한다.

* 안내전화: 032-937-6917~9(옥토끼우주센터)
* 홈페이지: http://www.oktokki.com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고종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즈)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66)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우리 군은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외세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일본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에 강압에 의한 강화도 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를 맺어 인천, 원산, 부산항을 개항하게 되고 또한 우리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 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인, 군관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이곳은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으로 애국애족 및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전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방유적으로서의 초지진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사적 제 2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포군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이다.